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람’을 입력하려다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고 보니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
사람은 어쩌다 삶을 살아가지만, 사랑으로 채워진다. 사랑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도 없고 비효율적이며 까먹기도 쉽지만, 삶의 방향은 결국 사랑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선은 항상 사랑을 향한다. 누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지. 그들의 행동이 필요를 향하는지, 정성을 향하는지 종종 관찰한다. 그리고 나 또한 미약하게나마 상대에게 필요한 사랑을 주려고 노력한다. 서툰 입으로 칭찬을 하고 관계에 공을 들일때면 그들을 닮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이번 글은 기독교에 관한 나의 가치관이 어떻게 교회를 떠나는 결론으로 이어졌는지 공유해보려고 한다.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 눈살을 찌푸릴 내용이라 블로그에 올리더라도 굳이 인스타 등에 홍보하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기독교인이라면 부디 나에게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들과 사랑하는 문화를 공유하고 있고, 지금도 하나님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비종교인이거나 다른 신을 믿는다면, 맹목적인 단일종교지향적 관점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부족하지만 선하고 싶기 때문에, 그들이 나에 대해 갖는 믿음을 파훼하고 싶지 않다.
사람은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신의 실재여부와는 다른 층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이 없더라도, 약 2천년간 세계를 지탱해온 중심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분명 유의미하다. 국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의해서 사기나 살인과 같은 범죄행위가 악함을 정의했다면, 종교는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정의해왔다. 예를들어 부모공경은 유교사상의 중심 교리 중 하나고, 예수님을 닮아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의 중심 교리다. 그동안 사람은 종교가 있어서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삶만 있었다면 그들은 반복되는 일상과 부조리 속에서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과 종교의 관점에서 정상인과 비정상인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종교는 조금 다른 태도와 형태로 임하는 사람들이더라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회까지 그 관점이 적용되기는 힘들다. 정치는 올바름이 존재한다. 파이를 혼자 독식하는 사람은 종교적 이해의 대상이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반증 가능성을 불허한다. 증거가 나왔는데도 믿고싶으면 정치가 아니라 종교다. 종교는 옳음을 따지지 않는다. 다만 누구나 포용하고 사랑할 뿐이다. 종교는 삶을 더 잘 살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삶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포용해 괜찮다고 위로할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고 사랑을 실천하는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다는 위로에 중독된 사람은 사랑을 주기 위해 성장하지 않는다.
25년 기독교를 다시 믿기 시작하면서 했던 3가지 가정이 있다. 첫째, 신의 실재성에 상관없이 기독교가 삶을 해석하는 틀로써 역할할 것. 둘째,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사랑을 실천할 것. 셋째,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삶을 더 잘 살 것. 며칠 전 세 가정이 모두 깨졌고, 교회를 나왔다. 본인은 기독교를 믿는다면서 사랑 대신 악을 실천하는 위선을 보았다. 그들은 나에게 상처를 줬다. 그렇다고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도 기독교를 믿는다고 말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보다 좋아하는 서사는 구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다. 그들의 서투른 사랑이 어떻게 악함을 만들었는지는 사죄하지 않았다.
이 서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부족하다고 자각조차 못하는 사람을 전지전능한 영향력으로 삶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비약이 이뤄진다. 만약 그들이 삶에 목표를 두고 기도하는 신앙이 아니라 사람을 더 사랑하지 못해 회개하고 빌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올바른 신앙으로써의 성장이고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설득하는 순간 교회 망한다. 교회는 선을 추구하기 위해 개인의 악함은 방치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 교회는 순수한 사랑의 가치를 말하는 교리로써의 올바름을 잘 추구했는데, 그렇게 되면 삶을 더 잘 살기 위한 종교 자체의 목적성에서 한층 멀어지게 된다.
사람이 사람 자체의 사명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종교의 목적달성을 위한 세뇌의 현장이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만드는 가치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이 괜찮아지는 혁신을 추구하는데, 그렇기에 내 사명은 사람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 사명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행위에 있게 되는 순간, 인간으로써의 목표가 아닌 종교에 삶을 갖다받치게 된다. 그럼 우리가 그것을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생존을 위협받는 빈국의 아이를 도와주는 목적이 그들이 살았으면 하는 소망이라면 선이지만, 종교의 힘으로 살려냈으니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종교적 행위면 더이상 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위선도 아니고, 선도 아닌, ... 그들만의 선인 것 같다.
그렇다면 교회는 사교의 장인가. 청년부가 그들만의 선을 추구하고, 사교하며 자신의 선을 증명하는 자리일 뿐인가. 그 사이에서 삶의 의지까지는 종교가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지금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물론 청지기적 마인드 같은게 있지만... 니체의 네 운명을 사랑하라와 같은 말인데 그냥 신의 실재성을 부여해서 열심히 하다보면 이뤄주신다는 개념과 같다. 개인적으로 청지기적 태도를 좋아한다. 다만 그들이 노력을 해도해도 안될 때 끝이 결국 삶에 대한 실체적인 조언이 아니라 위로밖에 없다는 점과, 그 위로의 결론이 삶으로부터의 도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이라는게 그닥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그 속에서 교회가 본질을 추구할 때 청지기와 같이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지체들의 모임이 아니라 실존적 문제를 내려두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대하는 도피의 현장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가 하나님 사랑한다는건 변하지 않고, 그의 성전이 본질적인 가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물음일 뿐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듯이 나 또한 교회를 떠나고 비판하면서 신앙인이 가져야 할 본질적인 물음과 태도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쉬겠다고 했다. 그저... 나는 나를 위해 기도한다며 기도문을 읽어준 사람이, 마땅히 나를 사랑해야 할 사람이 책임과 헌신은 집어던졌다는 사실이 매우 화가 날 뿐이다. 그렇게 내던져진 삶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기독교가 내게 전하는 말과 교회의 역할이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나조차도 믿고싶지 않은 불편한 질문을 던져본다. 대형교회는 거대한 사교모임의 장일 뿐인가, 아니면 삶을 더 잘 살아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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