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텍은 서강대학교 아트&테크놀로지 학과를 말함
본질을 잊고 산지 3년 즈음 됐나. 잊고 살던 아픔을 일깨워준건 고등학교 동창의 소식 하나였다. 같은 랩실 다니는 형의 타대학 인턴 동료였다고. 고1 이후로 연락한 적이 없었던 사람. 형을 통해 전해들은 그녀의 감상은 “모두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었고,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대학 진학 이후 끝없는 추락의 향연은 나 뿐만 아닌 다른 사람도 유심히 보던 화제였던거다.
누구라도 붙잡고 길을 묻고싶은 심정이다. 끝났다 생각한 방황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1등”이나 “성공” 같은 마케팅 홀로코스트를 좇다가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누가 돌아오는 법을 알려주었음 좋겠다. 지구에서 출발한 보이저 1호가 행성을 스윙바이해 인터스텔라로 떠나는데, 결국 남긴건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지구 사진 한 장. 해왕성 근처에서 찍었다는 그 사진 하나가 아른거린다. 아, 나도 본질을 지나치기 전에 보았던 확신과 꿈이 거기에 있었다.
아텍. 인생을 살면서 겪은 두 번째 아픔이자, 내 영감의 고향이었다. 칼세이건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면 영원히 보지 못할테니 지구를 찍어보자고. 동료 과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극구 반대했다. 카메라가 자외선에 노출되면 망가질지 모른다며, 지구를 찍는건 무모한 짓이라 했지만 결국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반면 나는 아텍을 지원조차 해보지 못했다. 안하려 했던건 아니다. 내신이 높은 친구가 둘이나 지원한다며 극구 말리던 선생님의 말에 동의해버렸다. 아직도 그들의 소식을 들을때면 며칠간 우울해지곤 한다.
그곳은 내가 가고싶었던 단 하나의 학과였다. 아텍이 가고싶어 2년을 비교과에 갈아넣었다. 질리도록 말한 “과고생의 연구노트”도, “캔위성 경연대회”도, 교내 연구 수상도 다 아텍 하나때문에 한거란 말이다. 그런데 내신이 높다고, 안될 것 같다고 하는 담임선생님 말을 멍청하게도 들어버렸다. 하나고처럼 선생님 말 안들으면 졸업장 안나오는 것도 아닌데. 아텍 자소서만 1년을 넘게 썼다. 담임선생님한테 무릎이라도 꿇으며 나 정말 아텍에 가고싶다고, 지는 싸움이라도 지원이라도 해보고 싶다고 빌었어야 했다.
(첨언하자면, 대안으로 지식융합미디어학부에 SW특기자로 지원했다. 하지만 내 생기부는 특기자 맞춤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여기는 아텍이 아니었다.)
혹자는 말도 안된다고 할지 모른다. 거기보다 좋은 학교가 얼마나 많고, 안좋은 학교는 더 많은데. 학과 하나에 의미부여할 시간이 어디있냐고 할지 모른다. 내가 수시 6장에 모두 아텍 자소서를 써서 냈다고 하면 그제야 믿겠는가. 지원하라 했던 공대는 당연하게도 다 떨어졌다. 미디어와 예술 이야기밖에 안적혀있는데 어떤 공대 교수가 나를 뽑을지? 그나마 유사한 아주대 미디어학과 단 하나에 합격해 다니고있다.
그래서 3년간 잊고 살았고 나름 괜찮게 살았다. 아텍의 실패 이후 달라진 점이라면, 예술에 대한 촉수가 줄었다. 돈을 버는 것, 취업 잘되는 것 따위에 집중하는 나를 발견했고, 이는 22년에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일하면서도, 23년 군대에서도, 24년에 연고대 편입을 준비하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이상을 부정했고, 인디 음악을 들으며 시절을 추억했다. 꿈의 테두리에 자리한 나는 어느덧 취업과 진로를 걱정할 나이가 되었다.
실패는 방황의 시작이었다. 왜 실패했을까? 보이저 1호가 지구를 떠난 직후 가슴에는 “Made in Earth”를 새겨넣은 것처럼, 글을 더 잘 써서 나를 잘 표현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본질을 떠나보낸 후 썼던 글은 모두 이를 추억하는 내용이었다. 메모장에 쓴 글과, 인스타에 올리던 글, 그리고 빼먹지 않았던 연간 회고까지. 예술을 떠나보낸 후 기억하고싶던 마음을 담았다. 때론 희망에 가득차있었지만, 미안했고, 버리고 가는 길을 적을때면 쓸쓸했다. 컨아밈*을 보며 예술가가 직면한 현실을 조롱했고, 그렇지 못함에 감사했고, 그렇게 나는 굳어져갔다.
*컨아밈: 예술가 관련 글을 올리는 인스타그램 페이지(@contemporary_arts_meme)
미안하지만 공대생들을 혐오하게 됐다. 왜 아주대밖에 못갔냐고 하는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좋은 대학이 얼마나 많은데 왜 여기 왔냐고? 공부 더럽게 못했던거 아니냐고? 나는 아텍이 가고싶었을 뿐이고 그게 내 꿈이었다. 너네랑 다르게 난 갈 수 있는데가 하나다. 대학 진학하고 전여친 처음 만났을 때 “난 공대생 싫어한다”고 그랬다. 그녀는 화학공학을 하는 사람이었다. 예술을 등진채 공학을 전전하는 나에 대한 자기혐오기도 했다. 혐오는 간결하고 즐거울지 몰라도 나약함을 증명하는 자기붕괴의 과정이다. 무너지는 꿈을 제3자 마냥 방관하면서 현실을 혐오한거다. 마찬가지로 아주대는 부끄러웠다. 세종 멘토 8인에 뽑혀 강연을 갔을 때도, 학교가 어디냐 묻는 후배들에게 차마 대답을 못해 미대 다닌다 그랬다. 지금은 이 굴레를 벗어났다.
아주대 미디어는 아직도 실망스럽다. 미디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영상을 만든다. 디자인을 한다. 취업을 위해 싸운다. 그들에게 철학이란 존재하는가? 적어도 창의성은 있는가. 지구상에서 그 누구도 만들지 않았던 것을 해야함에도 이전의 창작물을 따라하기 급급하진 않은가. 처음에는 이 곳이 1998년 MIT 미디어랩을 표방해 만들어져 대한민국에서 디지털 미디어를 공부하고 싶으면 가야 할 첫 번째 장소였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그냥 나랑 한 학번 차이나는 선배랑 아텍도 별 다를거 없다며 그냥 하고싶은거 하자고 그랬다. 그럼 아텍에 대해 남아있는 내 인상은 그저 환상일까.
서론이 너무 길었다. 편입 포기하고 깨달은게 하나 있는데, 내가 바뀌지 않으면 대학이 바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텍에 대한 후회에도 적용된다. 너무나도 빠른 패배의식에 절여져 살아버린게 아닌가 싶었다. 예술이 하고싶다면 지금부터 하면 되는거 아닌가. 3년 방황의 결론이었다. 나는 예술 할거다. 고등학교 동창 안다던 친한 형, 지금은 내 연구실 선배 사수로 있는데, 같이 밥 먹고 연구실 돌아오면서 이 얘기 했다. 지금 자율주행 AI쪽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이 기술 활용해서 크리에이티브 할거라 그랬다.
스티브 잡스는 창업가 이전에 예술가 아닌가. 그가 돈을 좇아서 작금의 혁신을 만든 건 아닐거다.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예술 정신이 지금의 애플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해왔던 창업, 그리고 AI 연구도 “Connect the dots” 하듯이 엮으면 된다. 그렇게 꿈을 찾았다. 누가 갔던 길 따라갔던 적 없고, 지금 어줍잖게 이곳 저곳 보고 있었다. 근데 하고싶다면, 운명이라면 이 길을 누가 갔던 안갔던 간에 그냥 가면 된다. 수풀이 많으면 꺾으며 전진하면 된다. 진도가 나가던 아니던 간에 그냥 전진할거다. 그래야만 해서가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