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헤메는 꿈을 꾼 적이 부쩍 늘었다.
4년 전에 독립해서 학비, 생활비 다 내는 마당에 내 휴학을 저지할 수 있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학기의 휴학은 큰 결심이 필요했는데, 선배들이 하나둘 직장에 취업하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인생의 페이즈를 한 단계 진보하는 데에 조급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학기 일에 집중하지 못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무엇보다 겨울간 2025년 회고를 쓰면서 본질을 잊은 채 달리기만 하고 있다는 생각에 휴학하기로 했다. 뭘 하든 한 학기 동안 고뇌를 하고 돌아오면 내가 자퇴를 할지 졸업을 할지 결정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따금 곤충 소리를 들을 때면 5월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학교의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막 마쳤고 내 시간은 4개월이 지났다. 뭔가를 되게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정작 좋은 결과를 보여준 건 아무것도 없다. 지원사업이나 두어스(창업 부트캠프)는 떨어졌고 그거 준비하는 데에만 3할은 쓴 것 같다. 새 제품을 기획했지만 팔 방도가 없는 게 대다수고 그렇다고 릴스를 찍지도 못할 노릇이다. 기업의 특수성을 타는 인프라의 특성상 제품화가 어렵다. 그런데 제품을 파는 건 더 어렵다. 광고판에 제품을 적는다고 해서 팔리는 게 아니다. 일단 노출을 많이 했으면 고객들이 관심을 갖고 접근하게 만들어야 한다. 접근한 고객들에게 대표와 팀의 전문성과 신뢰를 보여줘야 한다. 그들의 믿음이 지출로 이어지도록 하는 영업 스킬은 덤이다.
어찌저찌 좋은 개발자가 된 것 같긴 하다. 초3 때 블록코딩을 시작해 초6에 드론, 중3에 앱, 고3에 위성까지 안 만들어 본 게 없다. 대1에 마케팅 인턴, 코테 준비, 대2에 프엔 개발자에 랩실 인턴을 하고 나서야 개발 세계가 어떤지 좀 알 것 같다.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영상 찍고 편집하면서 대부분을 보냈다. 편집하느라 밤을 새는 날도 많았다. 관련 전공도 하고 있으니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미디어 제작자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왜 제품 하나를 못 팔아서 쩔쩔매고 있는 거냐고. 답은 텅 비어 있는 콘텐츠 두뇌에 있다.
환경 특성상 내 주변 친구들은 모두 공학자/개발자들이다. 공학적으로 주어진 문제와 가이드라인이 명확하게 있고, 그들의 지식을 이용해 풀어내기만 하면 안정적인 월급을 기대하며 살 수 있다. 그들에게 콘텐츠는 상극이다. 콘텐츠는 관심을 요구하고, 사람과의 호응을 필요로 한다. 정답이 없다. 살면서 주변의 유일한 콘텐츠 제작자였던 나는 공학자들의 가치관에 공감하면서 자랐다. 이들은 자기 삶마저도 예측 가능한 것과 비판 가능한 태도를 추구한다. 그래서 내 창작이 예측 가능하고, 뻔하며,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는 것이다. 최악이다.
그간의 내 본질은 공학자였는데, 세상은 사업가로서의 존재를 요구한다. 분명 2025년 서문에는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성장하기 위한 나침반이라고 적어뒀다. 그리고 그 나침반이 일관적으로 어딘가를 향할 수 있는 이유는 존재가 본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팀은 무엇을 본질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이전에, 팀은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결국 콘텐츠로의 도약에는 공학자의 마인드셋을 버리고 미약하더라도 미디어 제작자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제야 잃어버린 콘텐츠 두뇌를 키워야 함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여름이 온다. 앞으로 복학까지 4개월이 남았고, 4개월 안에 첫 고객을 만들지 못하면 회사는 끝난다. 앞으로 남은 건 미친 듯한 런칭뿐이다. 런칭하고, 마케팅 돌리고, 마케팅비로 남는 자금 4개월 안에 모두 소진하고 학교로 돌아갈 거다. 대체로 창업가들이 빠른 실패(Fail Fast)라고 부르는 전략의 본질에는 콘텐츠적 마인드가 존재한다. 사람들이 호응할지 안 할지 알 수 없고, 예측 불가능하기에 성공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크리에이터의 감각과 노하우는 존재하고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그렇게 크리에이터로 존재한 후에 본질을 세우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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