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에 지수가 팀에서 떠났다. 일은 괜찮은데 내 말이 문제라고. 열심히 해도 칭찬은 각박하고 지적이 많았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고마운 존재를 내 실책으로 떠나보냈다. 지수가 들어왔을 때인 작년 12월만 해도, 우리 팀은 무너질 위기에 있었다. 사무실에 출퇴근하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고, 각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은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내게 비판을 쏟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던 순간에 창업을 하고 싶다며 지수가 들어왔다. 그녀는 리더인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토달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냈다. 뿐만 아니라, 반년간 같이 출퇴근하며 좋은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주었다. 쳇바퀴를 도는 것만 같은 창업 생활에서 벗어나 점차 같이 꿈을 꾸고 할 일을 해 나갈 수 있었고, 조금 지치더라도 존재만으로 큰 힘이 되어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시간은 흘러 지금이 되었다. 그녀가 준 커밋먼트는 귀했음에도 불구하고, 간사한 나는 결국 소중함을 잊었다. 지친 인생에서 벗어나니 팀이 해 나가야 할 과업이 보였고, 그 크기에 비해 우리가 쌓은 건 한참 못 미쳤다. 밥을 먹으며 나누던 꿈과 비전, 희망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덧 비교와 지적으로 얼룩져 갔다. AI를 더 잘 써야 한다고, 변혁하는 시대를 더 빨리 따라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상대방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내던져졌다. 노력은 AI를 잘 쓴다는 기준으로 산정됐고, AI를 덜 쓰고 10배의 시간을 들였다고 해서 그 노력을 인정하거나 칭찬할 수 없었다. 결국 AI를 더 잘 써야 한다고, 이것은 칭찬할 만한 노력이 아니라는 뉘앙스의 말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대단한 능력이 필요한 일이니까, 결과적으로 칭찬은 줄고 지적만 늘은 셈이다.
힘들다는 말에 같잖은 위선을 들이댔다. 랩실 시절에 뭘 해도 칭찬받지 못했기에 접고 창업을 시작하게 됐다면서, 그래도 네게 어느 정도 칭찬을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아니라길래 클로드와 상담을 시작했다. 결론은 성공하는 팀은 지적보다 칭찬이 5배 더 많다면서, 사람은 지적당하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AI와 다르게. 생각해보면, 랩실 생활 때 사수도 딱히 칭찬을 하지 않았다. 국제학회지에 논문을 쓰는 사수와 다르게 나는 논문 하나를 겨우 읽었다. 사수의 눈에는 얘가 그래도 0.1인분씩은 늘고 있겠거니 했을 거다. 하지만 북극성처럼 따라가야 할 사수에게 칭찬이 없는 하루하루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제서야 지수가 북극성처럼 따라야 할 내가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 수 있었다.
평소 선이라고 믿던 내가 지수에게는 악한 존재였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종교와 다르게 악한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에 그런 사람들을 보며 종교가 개인은 구원하더라도 그들을 보편적 선에다 내놓진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도 누군가에겐 똑같은 존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제야 데미안이 되었음을 알았다. 선을 추구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악이 될 수 있고, 그리고 그 행위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 그게 두려워서 무엇이라도 되기를 포기하면, 알을 깨지 못한 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는 선이나 어떤 사람에게는 악일 수밖에 없고, 둘 중 하나만 있는 삶은 모순이지 않나. 불의에 악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해야 하지만, 인간의 부족함으로 지금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악한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는 것 같다.
책의 뒷면에는 누구나 한 번쯤 데미안을 보고, 누구나 한 번쯤 데미안이 된다고 한다. 알을 깨고 나온 새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신을 뜻한다. 반대로 선과 악이라는 게, 사실 인간의 입맛에 맞게 정의되곤 한다. 아직도 기억나는 비유는 발효와 부패의 차이인데, 발효와 부패는 과학적으로 동일한 반응이지만 인간의 기호에 따라서 맛있는 김치가 되기도 하고 음식물쓰레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종교가 추구하는 방향은 선이고, 법률과 도덕으로 정하는 것은 악인 듯하다. 우리는 진정 선을 지향해야 함에도 악을 혐오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사회를 볼 때 무엇이 악인가에 대한 담론은 차고 넘치지만 무엇이 선인가에 대해선 종교 외에서 잘 논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창세기(성경)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 사과를 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된다. 그 사과를 선악과라 부른다. 그 이후로 선한 세계에서 퇴출당해 지구로 내려온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때 그 알이 세계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적어도 선과 악이 뭔지는 알고 있는데, 우리는 선과 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만약 전 세계 사람들이 본인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치가 집권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때로 악은 투표 같은 사소한 일에서도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들이 선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안겨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그들의 실책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블로그 >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2) | 2026.06.21 |
|---|---|
| 26년 상반기 회고 Pt. 1 (1) | 2026.06.09 |
| 26년 상반기 회고 Pt. 2 (1) | 2026.06.09 |
| 비로소 행복합니까? (0) | 2026.05.31 |
| 존재가 본질을 만든다 (4) | 2026.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