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 때 할머니댁에 가니 이모가 자신들(부모님) 세대가 가을이라더라. 할머니-할아버지는 겨울이라고. 그럼 나는 어디쯤일까 하니 봄, 그것도 5월의 봄인 것 같다. 그것도 여름을 준비해야 하는 끝자락도 중순도 아닌 5월 초. 지나간 4월의 여운은 가시지 않은 상태. 그러나 이제 슬슬 더워지는 늦봄을 준비해야 한다. 여름이 되면 결혼을 할 거고 커리어 하이를 찍을 것이며 아이를 키울 것이다.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를 모두 이룩하는 그 시대는 정말 뜨거울 것이다. 지겹도록 들었던 꿈이 뭐고 사랑이 뭔지, 다 헤프게 봄을 지내다 여름을 맞이해야 할 어른의 충고니까. 봄에 준비하지 않으면 푹푹 찌는 더위에 살갗이 타고 쉽게 지칠 것이다.
그런데 여름까지는 잘 모르겠고 늦봄부터 준비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내 나이 스물다섯. 결혼하기 전에 돈 모으고 취업하고 사랑도 해야 하는데,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다. "아직은" 그렇다. 연초에는 어떻게 성장할까 고민하고 연말에는 매년 성장한 모습에 놀랐었으니. 곧 있으면 뭐 하나라도 제대로 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이 슬슬 부럽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태어날 때부터 부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나만 할 줄 아는 것, 하지만 별거 아닌 성과 하나 달성하고 나니 날 부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겼고 동시에 나도 누군가가 부러워졌다. 누군가는 부러운 거 끝도 없다고 그러겠지만, 사실 삶에서 은연중에 한 수많은 결정과 그 결정으로 인한 결과의 차이일 뿐인데 지금이라도 노력해서 달성할 여유는 없고 그래서 그냥 부러워하는 것 같다.
그런 거 보면서 성장하다 보면 괜히 표면적인 모습을 어쭙잖게 따라 하려다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사람은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A로 가냐, B로 가냐의 문제에서 B로 가겠다고 한번 선택했으면 그 결정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연구와 창업, 취업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창업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내 CV는 창업 얘기밖에 적혀있지 않다. 그렇다고 창업을 제대로 하고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몇 억씩 투자를 받은 것도, 고객이 있는 것도(최근에 한 명 생겼지만), 그렇다고 제품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시야가 있었으면 진작에 해냈을 것이다. 창업 안 하겠다고 2년간 편입준비를 할 동안 창업서적을 내리읽고 AI만 공부했을 것이다. 과거의 나는 항상 어리석고, 책에도 나오는걸 굳이 실패하면서 깨닫는다. 남들 하는 것처럼 좀 시원하게 뭔가 됐으면 좋겠는데 항상 경운기처럼 요란하고 느리다.
괜찮다. 이건 절망하는 게 아니다. 학창 시절 내내 순응하지 않던 내가 차차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섭리를 거스르는 게 아니라 따라가야 함을 깨닫는 것이다. 받아들이고 성장하고. 내딛고. 견디고. 가능하면 더, 더 빠르게. 하지만 지치지 않게. 비열하지 않게. 그렇게 인스타에 달리는 좋아요에 신경 쓰지 않고, 지난한 외로움을 견디면서 이룩하고자 하는 미래의 꿈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스스로를 무가치하다 느낄 때면 나로 인해 변화한 사람들을 곱씹는다. 더 큰 영향력을 향해 더 공부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안될 것이다. 삶은 마치 사랑 같아서, 내가 좋아한다고 상대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삶을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안된다면 그 삶이 자유로울 수 있게 놓아주어야 한다. 놓는 것, 놓는 고통을 견디는 것. 운명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어느 것 하나 된 게 없으므로 늦봄을 준비한다. 잘 정리된 짧은 글만 독식하던 내가 어느덧 책을 읽는다. 배속하지 않고 강의를 듣는다. 하루이틀이 꼬박 걸린다. 그런데 읽다 보면 과정이 보인다. 주인공이 결과를 얻기 위해서 어떤 고난을 겪는지, 정리된 글이나 AI 답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뭘 얻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읽지만 읽다보면 어느새 책과 닮는다. 늦봄이다. 절박해 보았는가. 미쳐 보았는가. 창업에 미쳐 1년 8개월을 내리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되는 일이 없었다. 조급하고, 부럽고, 짧은 시야로 잘못된 결정을 하거나 우유부단해 이도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일의 희망과 새싹으로 가득한 봄을 불안하게 보냈다. 느리게 가자고,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안 되는 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그제야, 늦봄에 있다는 게 보였다. 삶에 대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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